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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역사

일본. 사무라이의 시대 (넷플릭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넷플리스 사무라이의 시대

1551년 오다가문 - 오와리국
오다 노부히데 사망 -> 노부나가에게 권한 넘김
노부나가 : 지지기반 약했음. 동생과 경쟁 => 동생 제거

사무라이는 하이이라는 뜻이었음. 후에 무사를 뜻하게 됨

노부나가 <-> 노부카타(사촌) 와 영주 자리를 놓고 대립
1558년  노부나가는 농부 위주 3000명, 노부카타는 정예 3000명 거느림
전력은 노부나가가 약했지만, 노부나가는 약한 전력 보완을 위해 화승총 도입
(400~500정)
전투를 통해 사무라이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 농민군의 이점도 파악.
전투는 노부나가의 승리로 끝났고, 노부나가가 오와리국 영주가 됨

인근 다이묘였던 '이마가와 요시모토' 가 교토 공략 위해 가는 길에 오와리국 있었고, 노부나가는 길을 터주지 않음. (이마가와 요시모토 휘하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있었음. 전략가)

노부나가는 이마가와에 비해 병력은 부족했으나 정보력은 우위에 있었음
오와리 곳곳에 정찰병 배치하고 매일 보도 받았음. (적의 움직임, 적의 위치, 동태 등)
적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던 노부나가는 야간에 기습 공격함 (오케하지마 전투)
  ㄴ 15분의 전투로 이마가와 요시모토 죽임

노부나가는 전통적 방식의 전투를 하지 않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공격해 자신보다 강한 적들을 물리침 (화승총 활용, 야간 기습 (기존에는 기습이라는 개념이 없었음))

노부나가 휘하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있었음
  - 전투능력으로 노부나가의 인정을 받음
  - 농민군에서 시작해 장군이 된 경우임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부하가 됨

잇코이키 : 불교 중심으로 뭉친 무력집단. (승려, 상인 등)
노부나가와 대립 (노부나가의 강압적 폭력적 지배에 반기를 듬)

1571년 9월 : 노부나가는 엔랴쿠지 사찰을 공격
  - 사찰을 파괴하고 주민을 말살시킴. 약 2만명 몰살. 노약자도 모두 죽임
이후 사찰들을 차례로 파괴

이 문제가 주변 다이묘들을 자극
다이묘 중 1인인 '다케다신켄' (카이모국 다이묘) 노부나가를 공격
  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먼저 공격하고 그 뒤에 노부나가를 공격하기로 함
  ㄴ 다케다신켄 (3만 5천명 병력), 도쿠가와 이에야스 (8000명 병력)

1573년 1월 25일
다케다 신켄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싸움
   ㄴ 약 3:1의 병력차임에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공격 감행 -> 이에야스 병력 전멸
   ㄴ 이에야스 도피 후 성에 칩거. 다케다 신켄의 병력이 점점 이이에스의 영지를 압박.
이에야스 궁지에 몰렸으나 다케다 신켄이 지병으로 사망
  ㄴ 다케다 신켄은 3년간 죽은 사실을 주변에 알리지 말라고 함. 후계자 권력 다질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음
  ㄴ 후계자 : (아들) 다케다 가쓰요리 (다케다 신켄과 첩 상이에서 태어난 아들)
        ㄴ 신하들이 가쓰요리를 완전히 믿지 않음

1575년 가쓰요리는 1.5만명 병력으로 이에야스 영토에 다시 침범
이에야스 노부나가에 병력 지원 요청 -> 노부나가가 병력 지원.

1575년 6월 : 노부나가 + 이에야스군 진군
시타라가하라 평원에서 양측 병력 만남

- 노부나가의 특징 : 예습을 함. 맞붙을 상대에 대해 철저히 준비
- 다케다 가문 특징 : 신속하게 병력 재배치.

노부나가는 적 공격 약화위해 말뚝 울타리를 설치 (속도를 늦추기 위함)
핵심 결전 지역 요지로 다케다 병력을 유인
적군이 도착하면 울타리로 인해 속도가 느려질 것 (움직임 방해)
이 때 화승총으로 공격한다는 전략 세움

화승총의 단점 : 재장전 시간이 김
  ㄴ 노부나가가 단점 보완 : 3단 발사전법 ( 화승총사 + 궁수를 함께 배치)
      - 화승총 장전시간 동안 궁수가 공격 (시차 두고 교대로 공격)

다케다측 전법 : 적 주변으로 이동해 포위 후 사방에서 공격

나가시노 전투 : 가쓰요리 계속 전진 명령했고, 노부나가는 3단 발사전법으로 적군 차례로 말살
노부나가가 승리했고, 가쓰요리는 병력 1만명 손실. 퇴각함.
(노부나가 전략에 의한 승리. 대승)

동부 잔존 3대 다이묘 중 하나와 인근 다이묘에 심각한 타격 줌

다케다 가문 세력 급속히 약화됨

(!) 새로운 전법을 개발하고 (남들이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전략적 우위 가져감)
자신에게 유리한 방법을 찾아 전투에 적용함.
사전 예습으로 승률을 높일 방법을 준비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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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 : '이가국' 산 속의 반란군 숙청하려 함.
이가국 : 게릴라 전법을 통해 자신들의 영토를 방위함

주변 지형을 잘 알고 있고, 지물을 잘 이용함
이가국 : 닌자 - 시노비. 훈련. 첩자, 암살자, 정보수집. 남자, 여자 모두 훈련함
오다군을 공격해 노부나가가 이들을 말살하기로 마음먹음

닌자 -> 병참을 급습

오다 노부카쓰(노부나가의 아들) -> 이가국에 공격 들어감. 이가국 주민의 게릴라 공격에 패퇴

1581년 노부나가는 경험많은 장군 5명을 뽑아 이가국을 5방향에서 공격

노부나가군 진군하며 마주치는 모든 집과 마을을 파괴함. 주민도 모두 살해
  => 이가국 소통 완료

아즈치성 건설 : 총 7층으로 각 층마다 강인한 존재를 묘사한 그림을 배치

1582년 영토확장을 계속
  ㄴ  서부 모리가문 향해 진격 (서부측 다이묘 중 가장 강력)
  ㄴ 도요토미 히데요시(노부나가측 최고위 장군)에게 주 성채 공격 명력 "다카마쓰성"

히데요시, 5천명이 주둔중인 다카마쓰성을 3만명으로 포위
이 상태에서 모리가문에서 4만명 규모 원군이 진군함. 앞뒤에서 공격당할 처지에 놓임
히데요시, 노부나가에게 원군을 요청함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지원 지시
  - 독실한 불교신자.
  - 부당한 대우를 받아 노부나가에 대한 충성심이 낮아짐

미쓰히데는 지원을 가지 않고 그 병력으로 교토로 진군함 (노부나가 제거 목적)
  ㄴ 미쓰히데, '혼노지 사원' 공격 (노부나가가 있던 곳). 병력 취약 시기에 공격
  ㄴ 노부나가, 기습 공격에 결국 할복 자살함

노부나가 : 20년 전 작은 마을의 영주에서 일본 전역의 1/3을 통일시킴. 적절한 전략을 구사해 전력의 열위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 그러나 성품은 잔혹했고, 주변의 신망을 얻지는 못한듯 함.

혼노지 사원에서 노부나가를 제거한 후 미쓰히데는 아즈치성 (노부타다(노부나가 장남)가 있던 곳)을 공격. 노부타다도 제거

노부나가의 죽음으로 교토의 권력 공백 발생.
해당 시기 권력을 장악할 수 있던 세력은 크게 3명
1) 아케치 미쓰히데
2) 도쿠가와 이에야스 (동쪽에 있음)
3) 도요토미 히데요시 (서부에서 모리 가문과 대치중)

전령에게 상황을 전해들은 히데요시는 다마카쓰성 포위를 풀고 교토로 향함

미쓰히데는 병력의 열세를 인지하고 야마자키에 병력 주둔
  ㄴ 좁은 진입로에 미쓰히데의 성이 있어 병력의 열세에도 승산 있다고 판단한 듯
      ( 한 쪽은 산, 반대쪽은 강. 방어에 최적)
그러나 텐노잔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음 (치명적 실수).
  ㄴ 히데요시가 먼저 와서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음.
  ㄴ 화승총을 이용한 집중사격으로 미쓰히데 패퇴

미쓰히데는 농부들에게 발각되어 살해됨. (노부나가 살해 뒤 13일 만)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복수를 하며 가장 빠르게 대응

도요토미 히데요시 : 성이 없는 평민 출신. 비범함, 총명함으로 출세
  ㄴ 일본에서 가장 강한 다이묘가 됐고, 죽은 주군을 위해 복수해 정당성도 인정 받음
  ㄴ 그러나 동부와 서부의 다른 다이묘들이 있어 위험한 상황이었음

네네 : 히데요시의 부인. 히데요시가 권력을 갖는데 큰 기여. 히데요시 부재시 다이묘 대행

노부나가의 두 아들이 아직 있었음
노부나가의 큰아들이 '시바타 가쓰이에'에게 동맹 요청.
  ㄴ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 히데요시의 권력 장악에 반기.
=> 당시 계절이 겨울이라 즉시 군사행동 불가. (히데요시에게는 큰 행운)

1582년.
히데요시는 가쓰이에의 진군에 대비해
1) 산길을 지키는 요새 3곳에 병력 증원하고 지킴
2) 근처에 있는 '기후성'을 표위

봄이 되자 '가쓰이에' 군대 진군

1583년.
'기타노쇼성' : 시바타 가쓰이에의 본부에서 출발해
히데요시 군이 지키는 요새 3곳을 공격 => 2곳을 완벽 점령.
마지막 '시즈가타케성'(가장 큰 곳)을 공략하려고 했음
  ㄴ 이곳을 잃으면 히데요시는 권력을 잃을 수밖에 없음.
시즈가타케성을 포위

1583년.
시즈가타케성을 포위하고 있던 '가쓰이에'의 군대를 히데요시의 본대가 공격
  - 히데요시의 특기 : 빠른 기동력
      ㄴ 최하급 병사 출신이지만, 지략이 뛰어남.
포위군을 공격해 이들을 패퇴시킴. 이후 나머지 잃었던 요새 2곳을 공격해 탈환
시바다 가쓰이에 승산 없어진 것을 알고 할복 자살
=> 히데요시 가장 강한 다이묘가 됨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오다 노부카쓰(누부나가의 차남)가 동맹 맺고 히데요시 공격
=> 결판 안남.

이에야스, 히데요시와 대면
히데요시와 동맹 맺고 오른팔 격으로 들어감
  ㄴ 인질 교환으로 서로에 대한 신뢰 맹세
       - 이에야스 : 이에야스의 차남을 히데요시에게 입양시킴
       - 히데요시 : 히데요시의 엄마를 인질로 보냄
=> 이 동맹으로 이에야스가 동쪽을 지켜줘 히데요시는 중부 통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됨

히데요시에게 필요한 것 : 정통성
관백이 되어 권력의 정통성을 얻기로 함
관백이 되기 위해선 적절한 가문 출신이어야 함.
  ㄴ 귀족인 후지와라 가문 (일본을 400년 이상 지배)의 특정 집안 출신이어야 함

황실에
1) 혈통있는 가문에 자신을 입양시켜 줄 것과
2)  정통성 부여할 다른 것들도 요구
댓가로 부서진 궁을 복구해주고, 황실 위신 세워주겠다고 함

=> 히데요시, 후지와라 가문에 입양됨 => 관백에 오름

1588년.
5년만에 영토를 일본 대륙의 1/3 => 1/2로 늘림

다테가문.
후계자인 '다테 마사무네'(장남) : 독안룡 (천연두 걸려 한 쪽 눈을 스스로 파버림)
다테 마사무네 => 아시나 가문을 공격

이때 히데요시는 법령 공표 (관백에 올랐기에 가능했던 것)
1) 도수령 (민간의 무기를 몰수 하는 것)
2) 다이묘들의 전쟁 금지 (평화법)

'스리아게하라' 에서 마사무네(공격측)가 아시나(방어측)을 공격해 승리 거둠

히데요시는 호조가문을 공격함 "오다와라 공성전"
  ㄴ 주변 다이묘에 자신을 지원하게 지시
  ㄴ '다테 마사무네'도 오다와라 공성전에 지원 오기로함. (일부러 행군 지연함)
다테 마사무네가 지원왔을 때는 히데요시가 호조가문을 정벌 완료함.
마사무네 단신으로 히데요시 찾아와 복종
=> 120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 전역을 한 명이 통일

1590년.
히데요시는 역설적 난관에 봉착
순식간에 대성했고, 수많은 다이묘를 거느리게 되었음.
이 다이묘들을 바쁘게 만들어야 했는데..
"일본에는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었음"
=> 히데요시의 난제. "사무라이들을 어떻게 하나???"

1590년.
히데요시는 일본 전역을 통일하고 경쟁자는 충성을 맹세하거나 패배

거대한 군사 조직으로 무엇을 해야하나?
=> 명나라를 공격할 계획 세움

명나라로 가려면 조선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알게됨
=> 조선에 '명'을 치려하니 길을 내어달라는 "정명가도"를 보냄

고니시 유키나가 : 히데요시의 요구를 조선에 전달하라는 지시 받고 조선에 감
=> 조선 : 거절 => 히데요시 조선을 정벌하기로 마음 먹음

1592년.
쓰시마섬(일본의 서부)에서 20만의 대군이 출동

1592년 4월 13일. 조선 침략
쓰시마 => 부산

조선 의여장 확재우(홍의장군). 군사를 모집. (사비를 털어 군사 모집)
  - 주요 목표 : 병참 급습 및 차단
  - 남강 근처의 일본군  포상. 병참을 기습해 승리.

히데요시는 후계자(자식)가 없었음.
정실인 네네는 나이가 많았고, 측실인 차차에게 '쓰루마쓰'를 얻었으나 아들 죽음
=> 이후 히데요시이상한 행동과 불안한 모습을 보임

히데요시, 조카인 '히데쓰쿠'를 후계자로 지명
도요토미 히데쓰쿠 : 비도덕적인 인물. 육체의 쾌락을 탐닉, 잔혹하고 난폭

1593년.
차차가 아들을 낳음. (히데요리)
도요토미 히데요시 => 후계자로 삼은 히데쓰구 제거.

히데요시, 마사무네에게 조선 참전을 지시
당시 조선 전황은 교착상태.
일본의 장군들은 전진도 후퇴도 못하는 상황 (히데요시가 공격을 지시했기 때문)

1596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궁중에는 명나라 사절단이 교토에 도착.
고니시를 비롯한 다른 협사가들도 조선에서 돌아옴
명나라 사절단은 히데요시에게 명나라 의복을 선사

명나라 황제의 서신에
'히데요시 그대를 일본의 왕으로 인정하며 나의 신하로 인정한다' 라고 쓰여 있었음
히데요시, 대노하며 명나라 사신 내쫓음.

히데요시, 조선 재침공 명령. 병사 10만명 규모

신하 및 다이묘 사이에서 불만 속출. 조선에서 얻을 수 있는게 없었기 때문.
다이묘들 불온한 움직임.

당시 히데요시는 건강 및 정신이 이상한 상황.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 옴을 직감하고 5명의 강한 다이묘를 불러 원로원 구성함
  ㄴ 히데요리를 보호해 줄 것을 맹세시킴
히데요리에게 권력이 무사히 넘어가길 바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국정 책임을 맡기고,
마에다 도시이에에게 히데요리 양육 담당(교육 담당)을 맡김.

1598년 9월.
히데요시 죽음

히데요시의 이름으로 조선에서 철군 명령
후계자로 히데요리를 공표했으나, 권력은 5명의 원로가  나눠가짐
'오대로'의 권력은 매우 미묘하게 배분함.  
  ㄴ 한 명의 다이묘가 다른 다이묘의 연합을 물리치기 힘든 정도로 힘이 배분된 상태
       (서로를 견제하게 만듬)

대부분의 다이묘들은 히데요시가 죽었을 때 전쟁을 준비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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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내용은 메모하지 못함.
기억나는 것은

도쿠가와의 권력이 점점 강해지는 것에 불만을 품은 히데요시에 충성하는 장군이
반기를 들고 다이묘들 연합해 전쟁을 일으켰으나
초기 우세하던 전세를 지속하지 못하고 결국 병력을 집결시킨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군사에게 패퇴당함.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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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에 뛰어난 사람은 전략으로 불리한 전황을 극복할 수 있음 (노부나가)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전략가도 잔혹하고 난폭한 국정 운영은 경국 적을 늘리게 됨.
결국 자신의 부하에게 살해당하게 된 것

히데요시는 노부나가가 죽고 그의 복수를 하며 정통성을 인정받았고
주변 다이묘들을 복속시키며 결국 일본을 통일시켰으나,
자신의 대에서 권력이 끝남.
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무리하게 병력 운용해 다이묘들로부터 신뢰를 잃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아래에 있었고, 그의 사후 히데요시의 부하가 되었음
숨죽이고 견디며 자신의 힘을 길렀고, 결국 자신이 모든 것을 얻었음.
참고, 견디고, 끝까지 남아 결국 자신이 일본을 얻게 된 것.

지금 힘들고 어렵다고 포기하면 안되는 이유.
견디고 또 견디다보면 언젠가는 다시 기회가 올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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